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찰스 밍거스 (문단 편집) == 생애 == [[애리조나]] 주 노갈레스에서 태어났지만, 대부분의 유년기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보냈다. 부모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여서 밍거스도 어릴 적 [[찬송가]]를 비롯한 개신교 음악에 익숙했지만, 이내 집에서는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던 [[재즈]]나 [[블루스]]에도 심취했다. 당시 [[인종차별]] 때문에 정규 음악 교육의 혜택은 거의 받지 못했지만, 학창 시절에도 [[트롬본]]과 [[첼로]]를 아마추어 수준으로나마 교습받는 등 계속 음악 수업을 받았다. 1930년대 후반에 레드 칼랜더에게 [[콘트라베이스]] 연주법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다만 그 때까지도 첼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개인적으로 계속 연습했다. 이후 당시 [[뉴욕 필하모닉]]의 수석 콘트라베이시스트였던 허먼 레인스하겐(Herman Reinshagen)에게 약 5년 동안 클래식 연주법을 비롯한 체계적인 베이스 연주법을 다시 배웠고, 로이드 리스로부터 작곡 개인 레슨을 받기도 했다. 1940년대 초반부터 바니 비가드와 [[루이 암스트롱]] 등의 밴드가 순회 공연을 할 때 비상근 베이시스트로 협연하면서 재즈계에 발을 들였고, 이후 [[비브라폰]] 연주자 라이어널 햄턴의 밴드에서 연주하면서 조금씩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50년대 초반에는 당시 [[비밥]]의 혁신가로 유명했던 [[찰리 파커]]와 잼 세션과 연주를 벌이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파커 밴드의 드러머 맥스 로치와 함께 데뷰 레코드라는 음반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1953년에는 파커와 로치, 디지 길레스피, 버드 파웰과 함께 퀸텟(5중주단)으로 팀을 이루어 잠시 공연했는데, 이 중 [[캐나다]] [[토론토]]의 매시 홀 실황이 재즈 팬들에게 'The Quintet'으로 회자되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인 명반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밍거스는 주로 비밥 베이시스트 정도로만 평가받고 있었을 뿐이었다. 같은 해 밍거스는 비밥 이후의 실험적인 음악을 위해 재즈 작곡가의 워크숍(Jazz Composer's Workshop)을 만들었고, 그 동안 코드(화음)에 기반한 즉흥 연주 위주였던 재즈 스타일에서 가능한한 악보화된 음악으로 재즈를 연주하는 시도를 했다. 하지만 이 시도는 기존 재즈 뮤지션이나 청중 모두에게 너무 분석적이고 되레 재즈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처럼 여겨졌고, 밍거스 자신도 악보로 기보하기에는 재즈의 세계가 너무 다양하다고 인정하고 포기했다. 그 대신 1950년대 중반에는 연주자들에게 [[피아노]]나 베이스 연주로 자신의 의도를 설명한 뒤, 자신 뿐 아니라 모든 연주자들이 초기 뉴올리언스 재즈처럼 더 자유롭게 그 틀에서 즉흥 연주로 음악을 뽑아나가는 방식의 새로운 워크숍을 열었다. 이런 방식으로 1956년에 애틀랜틱에서 나온 앨범이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Pithecanthropus Erectus)''''([[라틴어]]로 직립원인)였고, 밍거스가 사이드맨이 아닌 리더로 낸 앨범 중 최초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비록 인류학 지식이 턱없이 부족한 밍거스가 어설프게 곡을 설명한게 까이기는 했지만, [[듀크 엘링턴]] 이후 그와 다른 방식의 대규모 재즈 작품을 발표한 것이 크게 주목을 받았다. 1년 뒤 발표한 ''''더 클라운(The Clown)''''에서는 [[아이티]] 민중들의 독립 투쟁을 반영한 Haitian Fight Song을 삽입했고, [[존 카사베츠]]를 만나 영화 [[그림자들]]의 사운드트랙을 즉흥연주로 완성시키기도 한다. 그림자들 사운드트랙은 영화사의 뉴웨이브와 재즈사의 프리 재즈가 접목된 순간으로 기록된다.[* 원래는 [[마일즈 데이비스]]가 거론되었으나 여러 사정으로 찰스 밍거스가 맡았다. 정작 밍거스는 카사베츠의 영화가 아직 촬영 중이라는걸 알고 사운드트랙 녹음을 거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즉흥 작업에 대한 신념이 있었던 카사베츠의 끈질긴 설득으로 결국 샤피 하디와 즉흥연주로 완성시켰다.] 1959년에 메이저 음반사인 콜럼비아에서 내놓은 ''''밍거스 아 음(Mingus Ah Um)''''에서는 [[레스터 영]]과 [[듀크 엘링턴]], 젤리 롤 모턴 등 선배 뮤지션들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곡들과 함께 2년 전 [[아칸소]] 주 리틀록에서 흑인 학생들이 백인 학생들과 등교하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했다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아이젠하워]]에게 [[데꿀멍]]했던 주 지사 오벌 포버스(Oval E. Faubus)에 대한 공개적인 [[디스]]곡인 Fables of Faubus를 같이 끼워넣는 등의 행보로 음악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한편 1960년 애틀랜틱에서 발매한 ''''블루스 앤드 루츠(Blues & Roots)''''에서는 자신이 어릴 적 들었던 블루스와 흑인 영가의 추억을 바탕으로 한 Wednesday Night Prayer Meeting을 넣기도 했고, 1962년에 RCA에서 발매한 ''''티후아나 무즈(Tijuana Moods)''''에서는 라틴 풍 재즈 음악을 선보여 상업적인 감각도 다른 뮤지션들에 비해 떨어지지 않음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임펄스! 레코드]]에서 대규모 [[발레]] 스타일의 모음곡만으로 앨범 전체를 채운 ''''흑인 성인과 죄있는 여인([[The Black Saint and the Sinner Lady]])''''으로 엘링턴 이상의 복잡하면서도 대규모의 모음곡 형식 작품에 더욱 경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 앨범과 그 직후 발매한 셀프 리메이크 앨범인 ''''밍거스 밍거스 밍거스 밍거스 밍거스(Mingus Mingus Mingus Mingus Mingus)'''' 이후에는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는데, 대니 리치먼드와 재키 바이어드, 에릭 돌피, 조니 콜즈, 클리프 조던과 함께 결성한 섹스텟(6중주단)이 결성 몇 달 만에 콜즈의 지병과 돌피의 사망으로 와해되었다. 게다가 나름대로 공들여 집필한 자서전 'Beneath the Underdog'도 상당히 과격한 내용 때문에 출판해주겠다고 나서는 출판사가 없었고,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리다가 [[뉴욕]]에 있던 자택을 처분하고 잠시 연주 일선에서 물러나는 등 재기불능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1972년에 콜럼비아에서 'Let My Children Hear Music'을 발표하면서 다시 복귀했고, 1974년에는 카네기홀 무대에서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는 등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에 흔히 루 게릭 병으로 부르는 [[근위축성측색경화증]]에 걸리면서 베이스 연주가 힘들어지게 되었고, 1977년 이후 베이스 연주가 불가능해지자 작곡으로 관심을 돌렸지만 이내 손발이 모두 마비되면서 이것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결국 조니 미첼이 자신에게 헌정하는 앨범인 'Mingus'의 작업에 참가한 것을 끝으로 [[멕시코]]의 쿠에르나바카에서 요양하던 도중 세상을 떠났고,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장되어 [[인도]]의 갠지스 강에 뿌려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